“여름에 배추 녹아. 못 써. 열무 있고, 깻잎에 호박잎, 푸성귀 천지인데 무슨 배추? 잡히는 대로 다 김치고 겉절이고. 오이지 꺼내 먹으면서 여름 나.”
세종 때의 문헌 <산가요록(山家要錄)>에서 서른여덟 가지나 되는 김치-짠지 기록을 읽어내려 가는 판에 전해 들은 여름 김치 회상이다. 정은정 사회학 연구자의 아버지, 충북 음성 출신의 78세 어르신은 단호히 한마디 더하셨다. “한여름에 배추김치는 뭐, 서울 것들이나 그랬지, 뭐.” 한 세대를 사이에 두고 김치 감각이 이렇게 다르다.
막 여름이 달려오는 모양이다. 어느새 참외가 시장에 잔뜩이다. 가게에 난전에 손수레에 눈부신 노랑을 뽐내는 과채(果菜)가 무더기무더기로 앉아 행인을 붙든다. 노랑으로 아롱진 깔판 한쪽으로는 오이, 총각무, 열무, 얼갈이, 부추, 쪽파 등 온갖 채소가 뽐내는 풀빛이 짙다. 짙다 못해 노랑을 압도할 지경이다.
푸성귀의 풀빛이 노랑과 경합하는 이때, 이때가 전에는 칠순 어르신 말씀대로, 한여름 김치를 염두에 두고 첫여름 김치를 준비하던 때였다.
오늘날의 김치를 대표하는 통김치란 속이 꽉 차는 통배추, 곧 결구종 배추로 담근 김치이다. 안으로 얌전히 오므린 배춧잎 사이사이로 가볍게 소를 넣고 겉잎으로 가지런히 감아 익히면, 부드럽고 우아한 신맛이 여느 김치보다 오래 간다. 움이나 항아리를 다 헤집지 않고 한 통씩 꺼내 먹을 수 있는 만큼 간수하기도 좋다. 통김치가 20세기 이래 김장김치의 대표로 떠오른 이유다. 이윽고 통김치는 냉장고와 손잡고 보존 기간을 늘리더니, 더구나 고랭지 배추 재배와 손잡고는 사계절 김치로 변신했다.
이제 사계절 내내 김치 공장은 통김치를 쏟아낸다. 대중식당이 딱 한 가지 김치만 낸다면 통김치가 제일번이다. 김치찌개며 온갖 부재료와 손잡은 김치찜이 통김치 생산소비의 또 다른 뒷배이다.
오늘날 국제적인 식품 규격인 코덱스(Codex)에 오른 ‘김치(kimchi)’ 또한 “주원료인 배추와 기타 채소들을 손질, 절단, 절임, 양념하여 발효시킨 것”으로 바로 통김치이다. 한국인의 일상생활에서, 한국을 넘은 국제유통에서 통김치는 김치를 대표한다.
전에는 김장도 다 떨어지고, 4월 이후 한여름까지 유채, 산갓, 부추, 깻잎, 가지, 풋고추, 파, 양파, 토마토, 양배추, 총각무, 오이가 다 소담한 김치를 이루었다. 통배추 담글 때처럼 복잡한 양념을 준비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재료를 덜 써도 좋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겉절이도 하고, 무짠지며 오이지를 찬물에 말고 초를 더해 김치를 대신할 음식을 마련했다. 풋고추, 양배추, 오이가 물김치로 변신하고, 짠지가 아니라도 그때그때 가지, 오이, 미역을 써 냉국을 말아 새콤하고 상큼한 맛에 기대 여름을 견뎠다.
지역도 살아 있었다. 고구마줄기김치, 양파김치 등은 호남 산지의 계절 김치이자 별미 김치이다. 콩잎을 잘 먹는 영남에서는 초여름 즈음 콩잎이 연할 때 콩잎물김치를 담갔다. 가을로 다가가며 콩잎이 억세어진 ‘단풍콩잎’은 소금물에 푹 절여서 콩잎김치를 담갔다.
또 다른 분께 여쭈니 요즘 배추보다 키가 큰 토종 반결구종 배추에 밥을 으깨 넣어 담근 영남 내륙의 김치를 기억하는 분도 있다. 지역에 따라서 열무김치에 보리밥을 넣어 풍미를 더하는 방식도 있거니와 한여름에 불 앞에서 버티고 찹쌀풀 쑤어 넣느니, 아예 밥을 넣어 물성과 풍미를 달리한다는 조리와 맛의 기획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시 <산가요록> 앞으로 다가앉는다. 우리가 익히 아는 동치미, 나박김치, 물김치 계통이 550년 전에 이미 오롯하다. 책장을 더 넘기니 과일을 소금에 절여 풍미를 증폭하고, 꿀로 단맛을 끌어올리고, 수분까지 넉넉하게 잡은 복숭아김치, 살구김치가 등장한다. 이윽고 수박김치에 이르러서는 침샘이 터질 지경이다. 문헌으로 보거나, 칠순 어르신께 한 세대를 건넌 이야기를 듣거나 참 아깝다. 그 계절 감각, 지역 감각, 다양한 맛의 기획이 아깝다. 아까워하는 그 마음으로 김치라는 음식을 헤아린다. 문헌 속에서 한 가지 김치라도 더 확인하고, 세대가 다른 분들로부터 하나라도 더 듣자고 달려든다.
“Keep Calm and Carry On,” 조용히 하던 일 하기. 폭풍의 나날, 다시 책을 펴고 다시 귀동냥을 이어간다. 평화가 꽃피면, 그때 북에 역사적 김치, 남의 김치 이야기를 전해 줄 사람이 되어도 좋겠다. 북의 김치 이야기를 더 잘 들을 사람이 되어도 좋겠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