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한국인의 밥상’] 제111회 – 묵은지와 할머니
제작 KP커뮤니케이션 / 연출 황우광 / 작가 홍영아
2013년 3월 7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 8시 25분
한 해 우리 밥상에서 쌀 다음으로 가장 많이 소비되는 것은 김치이다. 잘 익은 김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시어지다가 6개월 이상 되면 묵은지가 된다. 2000년대 이후 외식산업이 활성화되고 웰빙 바람이 불면서 옛 음식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자연스럽게 묵은지 열풍도 불었다. 서구화된 입맛에 길든 현대인들이 싱싱하지도 않고 때깔이 곱지도 않은, 오래 삭혀 시큼한 냄새가 나는 그 묵은지에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랜 시간을 한 자리에서 묵혀야만 만들어지는 묵은지. 그 독특한 풍미와 묵은지가 만들어내는 음식 이상의 정서와 맛을 찾아가본다.
■ 땅끝마을, 겨울 배추 주산지 해남에서 맛본 묵은지
땅끝 해남은 전국 겨울배추 생산량의 70%를 차지하는 곳. 청정지역 황토밭에서 겨우내 해풍을 견디고 얼었다 녹았다 하며 튼실하게 자란 배추는 첫맛부터 끝 맛까지 달다. 배추 산지에서 만난 묵은지는 어떤 맛일까. 묵은지에 톡 쏘는 맛이 일품인 홍어를 올려놓고 돼지고기 수육과 함께 싸먹는 홍어 삼합은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맛.
김장철에 넉넉하게 김장을 해서 아홉 자식에게 싸서 보낸다는 김광심 할머니. 퍼주고 퍼주어도 없어지지 않는 할머니의 마음이 묵은지에 담겨있는데… 할머니의 정이 만들어내는 묵은지 밥상을 만나본다.
■ 묵은지의 깊은 맛, 명인들의 손에서 다시 태어나다
‘묵은지’ 하면 김치찌개가 가장 유명하지만, 음식 전문가들에게 묵은지는 다양한 요리의 재료가 된다.
나주의 천수봉 향토 음식 전문가 댁에는 김장 김치에 조기를 돌돌 말아서 독에 차곡차곡 쌓아 묵혀두고 먹는 음식이 있다. 입맛 없을 때 하나씩 꺼내 그대로 조리면 묵은지의 시큼하고도 깊은 맛이 생선의 비릿한 맛을 잡아주며 조화롭게 어울린다고.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의 나주 나씨 25대 종부 강순의 김치 명인의 묵은지 밥상도 시선을 끈다. 1년에 200여 가지가 넘는 김치를 담는데 그 중 특유의 향과 톡 쏘는 매운맛의 갓김치 묵은지로 버무려내는 비빔밥과 도토리묵은 입맛을 살아나게 하는 별미음식. 김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그녀의 손맛이 만들어낸 묵은지 밥상. 오랜 시간 종갓집 종부로 살아온 세월이 있었기에 강순의 김치 명인이 차린 묵은지의 깊은 맛은 남다르다.
■ 저수지 속 묵은지를 건져라
전북 순창의 강두마을. 이 마을 저수지에는 700포기의 묵은지가 있다. 마을 주민이 대나무와 드럼통으로 뗏목을 만들고 그 뗏목을 타고 김치를 저수지에 담아 놓은 지 햇수로 3년. 저수지의 얼음을 깨며 드디어 매달아 놓은 묵은지를 꺼내는데…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묻어놓은 저수지 묵은지 맛은 어떤지 그 현장을 찾아가본다.
■ 묵은지를 닮은 인생, 할머니
배추는 땅에서 한 번 뽑힐 때 죽고, 통배추의 배를 가르면서 죽고, 소금에 절여지면서 다시 죽고, 고춧가루와 젓갈에 범벅되어서 또 죽고, 마지막으로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서 죽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묵은지 맛을 낸다. 그렇게 다섯 번 죽으면서 오랜 시간 묵혀야 맛이 나는 묵은지는 오랜 세월 인생의 역경을 온몸으로 이겨 내온 할머니의 모습과 닮아 있는 듯하다. 오래된 것, 작은 것 하나도 함부로 하지 않는 지리산 바래봉의 김채옥 할머니. 자식들, 손자들을 위해 담아내는 묵은지 한 점에 할머니의 농익은 인생이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