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아파트 ‘딤채 계’가 키운 1조 시장…김치냉장고 35년사

머니투데이입력 2019-06-29

[편집자주] 가전제품이 생활의 일부가 된지 오래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기술이 삶의 트렌드를 만들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머니투데이 전자팀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世上萬事)’을 ‘가전(家電)’을 통해 들여다봅니다.

김치냉장고의 역사는 19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격적인 김치냉장고 시대를 열었던 만도기계(현 위니아만도)의 ‘딤채'(1995년 출시)보다 10년 정도 전에 이미 김치냉장고가 나왔다.

금성사(현 LG전자 (79,300원 상승400 -0.5%))가 1984년 10월 김장철에 맞춰 출시한 ‘GR-063’이 주인공이다. 당시 금성사는 ‘국내 최초 금성 김치냉장고 탄생’이라는 문구로 대대적인 홍보를 했다. ‘김치냉장고’라는 신조어가 이때 탄생했다. 이 제품은 용량 45ℓ(리터)의 아이스박스 모양으로 자체 온도 조절이 가능한 냉장고였다.

대우전자도 같은 해 김치냉장고 ‘스위트홈'(18ℓ)을 개발, 이듬해인 1985년 판매했다. 이런 사실은 1974년 세워진 대우전자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분할 매각되면서 잊혔다가 2008년 인천의 대우일렉트로닉스 협력업체 직원 집에서 첫 출시 당시 판매된 제품이 발견되면서 확인됐다.

모두 지금의 김치냉장고와 비교하면 성능이나 디자인이 한참 떨어지지만 당시로선 혁신적인 제품이었다. 문제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는 것. 아파트가 많지 않던 시절 김치는 김칫독에 담아 땅 속에 묻어 보관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시대와 시장 수요를 앞서간 냉장고는 시장에서 철저하게 외면받았다.

김치냉장고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린 건 1990년대 중반이었다. 1980년대 말 서울올림픽 등으로 아파트가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김칫독을 묻을 마당이 없어졌다는 점을 냉각기술에 남다른 자부심이 있던 에어컨·공조업체 만도기계가 제대로 파고들었다.

만도기계가 내놓은 딤채가 초반부터 선전한 건 아니었다. 왜 김치냉장고가 따로 필요하냐는 반응이 많았다. 당시 딤채는 용량 53ℓ 제품 기준 50만원으로 일반냉장고 가격(70만~80만원대)과 큰 차이가 없었다.

시장 수요를 터트린 출발점은 강남 일대 아파트의 입소문이었다. 만도기계가 궁여지책으로 강남 일대 아파트에 3개월 무상대여 조건에 딤채 5000대를 뿌린 게 먹혀들었다.

뒤늦게 김치냉장고 맛을 본 강남 일대에 난리가 났다. 딤채 구매 ‘계’까지 등장했다. 내친 김에 만도기계는 ‘딤채 계’를 만들면 계원 10명당 딤채 1대를 선물하는 마케팅에 나섰다.

입소문 마케팅의 위력으로 만도기계는 외환위기를 거치면서도 공장을 풀가동하는 몇 안 되는 회사로 유명세를 탈 수 있었다. 딤채는 출시 첫 해인 1995년 4000대, 1996년 2만5000대, 1997년 8만대, 1998년 20만대가 팔렸다.

만도기계의 딤채 개발사에도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범현대그룹인 한라 (3,730원 상승25 -0.7%)그룹 계열사로 1990년대 초반까지 현대차 (140,000원 상승500 -0.4%)에 차량용 에어컨을 납품하던 만도기계의 최대 고민은 여름 한 철 에어컨을 팔고나면 공장을 멈춰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덩달아 전국의 에어컨 대리점도 일손을 놨다.

이때 한 대리점 사장이 프랑스엔 와인 냉장고, 일본엔 생선 냉장고가 있는데 한국의 전통음식인 김치만 따로 보관할 수 있는 냉장고는 없으니 이걸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바꿔 말하면 1980년대에 금성사와 대우전자가 출시했던 김치냉장고가 얼마나 처참하게 실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당시 삼성전자 (47,000원 상승500 1.1%)·LG전자·대우전자가 꽉 잡은 가전 3각 구도에서 싸움이 되겠냐는 비관론이 나왔지만 돌파구가 필요했던 경영진은 밀어붙였다. 1993년 신사업팀 ‘유레카’를 꾸려 매년 김치 100만포기를 담그면서 딤채를 개발했다.

안 만들던 제품을 만들다 보니 시제품조차 만들기 쉽지 않았다. 에어컨 생산라인이 쉴 때를 이용해 틈틈이 시제품을 만들고 새로운 사업에 싸늘한 부품업체를 찾아다니며 설득해야 했다. 에어컨 부품을 납품받을 땐 ‘갑’이었지만 김치냉장고를 개발하면서 ‘을’이 됐다.

딤채를 처음 시장에 내놓을 때도 자동차 부품업체가 만든 냉장고라는 선입견이 우려돼 회사 이름을 감췄다.

김치냉장고가 장사가 되자 삼성전자가 1998년 김칫독을 내세워 김치냉장고 시장에 뛰어들었다. LG전자도 1999년 서랍식 김치냉장고를 내놓으며 15년만에 다시 김치냉장고 시장에 복귀했다. 2000년대 들어선 중국의 하이얼도 김치냉장고를 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김치냉장고의 진화도 빠르게 진행, 35년 전 45ℓ였던 제품은 이제 600ℓ급까지 나온다. 보관용도도 와인, 야채, 생선 등으로 늘었다. 딤채 시절까지는 위에서 문을 여는 ‘뚜껑식’이 대부분이었지만 물건을 꺼낼 때 허리를 숙여야 해 불편하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일반냉장고 같은 ‘스탠드형’이 대세가 됐다.

김치냉장고 시장이 한창 뜨거웠던 2000년대 시장 규모는 연 1조원을 넘었다. 2002년 한 해 판매된 김치냉장고가 180만대였다.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최근 판매실적은 예전만 못하다. 김치는 한국 음식이라는 인식 때문에 해외시장 진출에도 한계가 있다.

업계 관계자는 “80~90년대 김치냉장고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던 것처럼 발상의 전환이 절실한 때”라고 말했다.